2001년 5월 25일 금요일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누웠다.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과 더 돌아볼 곳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집에 있는다고 공짜로 밥을 주는 것도 아니니 한 번 더 버스표 환불을 요청하러 갈 겸 슬슬 일어났다. 빨래를 조금 하고, 2층 버스를 탔다. 버스는 유별나게 재미있지도 않은데 시간만 너무 많이 걸린다. 남는 게 시간인 날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런던 시내의 도로는 거의 왕복 2차선 아니면 왕복 4차선이다. 물론 자동차가 서울에 비하면 무척 적지만, 길이 워낙 좁고 사람들이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건너기 때문에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 도로 체계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아 소통이 그럭저럭 유지되는 것 같다. 그래도 2층 버스가 명물이니 한 번은 타 봐야겠지.
Victoria coach station에 도착하여 한 줄 서기를 30분 한 끝에 물어 봤더니 역시나 환불 안 된단다. 꺼이꺼이. 한 줄 서기는 확실히 합리적이다. 먼저 온 순서대로니까. 우리네 각 줄 서기는 다분히 운이 작용한다. 그래서 때론 늦게 왔어도 먼저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기분이 짱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기분이 정말 더럽다. 너무 늦어서 모험을 하여 줄을 옮겼는데, 원래 줄이 더 빠르면 그건 최악이다. 한편 생각하면 우리네 문화가 더 재미있긴 하다. 그러나 이건 재미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우리네도 바뀌어야겠다.
이왕 나온 김에 관광이나 더 하자하고 St. Paul 성당에 갔는데, 여기도 돈을 내야 한다. 5파운드나. 지금 상황에선 더 이상의 지출은 무리다. 겉만 보고 가기로 했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워서 성당 왼편으로 돌아갔더니 관광객 출구가 있다. 무턱대고 그리로 들어가 봤더니 거기에 식당과 Cathedral shop이 있다. 사진엽서로나 구경하려고 모험을 했는데 가이드북도 있지 않은가? 안내 책자로 대충 관광을 마치고 나왔다. 좀 어설픈 곳은 이런 식으로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관광코스 마지막에 관광상품 판매소가 있으니 그곳에 들러 사진엽서와 안내 책자만 잘 봐도 거진 관광한 셈이 된다.(물론 외국까지 나온 것엔 직접 보는 데 의미가 있지만 말이다.)
내일 숙박비를 지불하려면 돈을 바꿔야 한다. Piccadilly Circus역에서 내려 Lower Lesent Street 방향으로 나와 왼편으로 돌아 에로스 상을 보고 오른쪽 길로 가서 오른쪽으로 꺾은 후 건너편 20m쯤 전방을 보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있다. 거기서 여행자수표를 환전하면 수수료가 없다. 물론 그런 곳은 많다. 환전소에 commission free가 적혀 있는지 확인하면 된다.
사진엽서를 파는 곳은 많은데, 대부분 1파운드에 6장 정도다. Trafalga Square에서 National Gallery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1파운드에 10장 주는 곳이 있다. 엽서 질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니 싼 곳을 잘 찾아 구입하자.
Trafalga Square에서 사람들 구경하고, 성경도 읽으면서 쉬다가 저녁 끼니를 해결하려고 또 공원을 찾았다. Charing Cross역 옆의 공원 벤치를 떡 차지하고 바나나를 먹기 시작했는데 옆에 할아버지 한 분이 슬그머니 앉으셨다. 왠지 나를 쳐다보는 듯. 그래도 꿋꿋이 바나나를 먹는데 드디어 말을 걸기 시작하신다. 첫 번째 말부터 못 알아들었지만 통밥에 여행객이냐는 말을 물으시는 것 같았는데 좀 돌려 말씀하셨다. 그로부터 짧은 영어의 한계로 단발식의 대화가 5분여 지속되었다. 혹시 무슨 의도적인 접근은 아닌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하지만 그냥 얘기가 하고 싶으셨던 분이었다. 하지만 영어가 짧은 걸 어떻게 하겠나. 재미가 없어지신 할아버지는 슬슬 두리번거리시더니 계속 걸으시겠다며 떠나가셨다. 아쉽다. 사실 여행에 영어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 "Where is ...?" "How much ...?" "Take a picture." "I want to ..."만 구사하면 별 문제가 없다. 어제처럼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그래서 영어를 신경도 안 쓰고 그냥 왔더니 이런 아쉬운 경우가 생기네. 쩝~
숙소로 돌아가려고 국철을 탔는데, 좀 앞쪽의 남자가 계속 나를 노려보는 것이다. 왜 저러지? 나도 노려보니 잠시 눈을 돌리다가 또 노려보는 것이다. ‘헉! 저 놈이 왜 저러지?’ 갖가지 상상이 머릿속에 그려지며 쫄기 시작했다. 숙소가 있는 St. Johns역에 서는 열차가 아닌 London Bridge역과 Lewisam역에 서는 열차를 타고 Lewisam역에서 내려 걸어가려고 했는데, 같이 내렸다가 봉변을 당하면 안 되니 사람 많은 London Bridge역에서 내려 St. Johns 역으로 가는 열차를 타기로 했다. 근데, 그 놈이 불쑥 일어나 London Bridge역에서 내리는 것이다. 그럼 난 계속 가야지. 근데 내려서도 가지 않고 왔다 갔다를 하는 것이다. 열차가 떠나 플랫폼을 훑어보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다. 설마 다시 탔을까? 계속 되는 긴장의 순간들. Lewisam역에 도착하여 내렸는데, 놈은 보이지 않았다. 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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